<유태현 전 주베트남 대사의 격주기획연재> 베트남과 호치민 (8) 성난 말(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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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 마르크스

마르크스 사상을 접하다
1913년에 미국을 떠난 타인(호치민 주석)은 르아브르에 잠간 들렀다가 영어를 공부하러 영국으로 갔다. 이때 타인은 이미 불어는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지만 세계를 떠돌면서 특히 미국에 머물면서 영어의 필요성을 절감한 것 같다. 영국에서 처음으로 얻은 일자리는 학교의 눈을 치우는 청소부였다. 그는 나중에 자서전에서 이렇게 썼다.

“정말 힘든 일이었다. 온 몸에 땀이 나는데, 손과 발은 꽁꽁 얼었다. 얼어붙은 눈을 깨는 것은 쉽지 않았다. 몹시 미끄러웠기 때문이다. 8시간의 일이 끝나면 완전히 지쳤고 배도 몹시 고팠다.”

그는 곧 그 일을 그만두고 보일러를 관리하는 일을 맡았으나 그 일은 더 힘들었다. 마침내 타인은 고급 호텔의 유명한 요리사 밑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홀에서 일하면서 그는 남은 음식을 깨끗이 보관했다가 주방으로 돌려보냈다. 이를 본 주방장이 그 이유를 묻자 타인은 “음식을 버리면 안 됩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면 됩니다”. 라고 대답했다. 이러한 타인을 좋게 본 주방장은 타인에게 요리 기술을 가르쳐 주겠다고 말하고 케이크 굽는 곳으로 배치했다. 이것은 임금을 더 많이 받는 자리로서 전례가 없는 큰 사건이었다. 타인은 열심히 일하여 저축한 돈으로 영어 교습을 받았으며 해외 노동자연합에 가입하는 등 정치조직 활동에도 열심이었다. 해외 노동자연합은 외국 노동자들의 노동 조건 개선을 목표로 하는 비밀조직이었는데 중국인 노동자들이 주를 이루었다. 그는 또 아일랜드의 독립이나 좌익들의 거리시위에 참여 하기도 했다.

타인은 이 무렵에 마르크스의 저작을 처음으로 접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영국은 자본주의 사상을 처음으로 정리하여 최초의 경제학 책이라고 불리는 [국부론(Wealth of Nations)]의 저자 아담 스미스(Adam Smith)를 배출한 나라이며, 동시에 공산주의 창시자 칼 하인리히 마르크스(Karl Heinlich Marx)가 공산주의의 경전인 [자본론(Das Kapital)]을 저술한 곳이기도 하다

마르크스는 독일의 전신 프러시아에서 유태인 박해를 피해 기독교로 개종한 변호사 아버지와 네덜란드 귀족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유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는 젊은 시절부터 자본의 핍박을 받는 노동자의 지위 향상에 관심을 갖고 이를 위한 대책 연구에 몰두하였으며 이러한 선진 사상 때문에 고국인 프러시아에서 추방당하고 프랑스와 벨기에에서 망명 생활을 했으나 조국의 방해로 이곳에서도 살지 못하고 영국으로 가서 런던의 빈민가에 살면서 자본론을 집필했으며 그곳에서 쓸쓸한 최후를 맞았다.

당시 영국은 자본주의가 가장 발달했던 나라로 노동문제 등 자본주의의 문제점도 나타나기 시작한 시기여서 마르크스의 사상을 정리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마르크스의 사상을 접한 타인은 크게 감명을 받은 것으로 짐작되며 그의 독립을 위한 투쟁과 조국 베트남의 재건 방법에 마르크스의 방법과 유사한 것이 많이 있다. 타인은 영국에 있는 동안 파리에 있는 판추찐에게 수차례 서신을 보냈는데 이것이 프랑스 당국의 손으로 들어갔다. 영국 경찰은 프랑스 대사관의 요청에 따라 타인이 편지에 쓴 주소를 수색했지만 그런 사람은 없었다. 용의주도한 타인이 그런 사태에 대비하여 가짜 주소를 적었을 것이다.

몽마르트의 벙어리

타인이 프랑스로 돌아온 시점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대부분의 자료들은 그의 프랑스 귀환 시점을 1917년 12월로 본다. 타인도 자서전에서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을 때 프랑스로 돌아 왔다고 썼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프랑스는 전선으로 떠난 프랑스 노동자들을 대체하기 위하여 수많은 베트남인들을 징발했다. 1911년대 프랑스에 거주하는 베트남인은 1백 명이 채 안됐는데 1919년경에는 수천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조국 해방을 위해서 무슨 일이든지 하겠다고 결심한 애국자에게는 열렬한 지지자들을 모으며 활동을 벌이기에 적합한 장소였다.

타인은 방 한 칸짜리 이 아파트에서 사진을 수정하고 골동품에 색칠을 하여 연명하면서 독립운동에 몰두하였다. 당시 파리에 머물고 있던 판쭈찐은 1906년 프랑스 총독에게 보낸 편지 때문에 프랑스 교포 사회에서 지도자로 인정받고 있었다. 1차 대전 초기에 반역혐의로 체포 된 후에 신중하게 행동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베트남 독립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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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에서 타인이 살던 아파트

타인은 프랑스에 돌아오자마자 베트남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세계대전이 장기화 되면서 프랑스 사회는 점점 불안해 졌다. 1917년 프랑스군 내에서 심각한 폭동이 일어났고 급진파는 반전 선전을 하면서 전국에 노동조합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식민지의 공장이나 조선소 노동자들은 낮은 임금을 받으며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선동에 특히 민감했다. 그런 활동에서 식민지에 반대하는 열정에 넘치는 전투적인 젊은 베트남인은 특히 유용했다.

타인은 몽마르트(파리의 한 지역 명)의 막다른 골목에 있는 지저분한 호텔에 묵고 있었으며 프랑스 사회당의 어느 지부회의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거기에서 수바린을 만났으며 수바린은 그를 포부르클럽이라는 연설그룹의 설립자인 폴데에게 소개해 주었다. 타인은 이 클럽의 주간대화에 정기적으로 참석하였는데 이 대화는 급진적 정치에서부터 심리학이나 신비주의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분야를 다루었다. 타인이 몹시 수줍어하고 말이 없어서 참석자들은 그를 몽마르트의 벙어리라고 불렀다. 그러나 폴데는 타인을 격려하여 수줍음을 극복하는 수단으로 대중 앞에서 연설을 하게했다.

첫 번째 연설에서 타인은 식민지 치하의 동포들이 겪고 있는 고난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는데 말을 더듬어서 알아듣는 사람은 별로 없었으나 주제에는 공감했다. 연설이 끝나자 청중은 환호했고 곧 다시 연설해 달라는 초대를 받았다.

<달랏대학교 한국학과 강사, 럼동성 한국관계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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