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이 만들어 준 새로운 기회

고마움과 서러움

며칠이 지난 어느 날 김병하 친구가 어제 한 사람이 미국으로 갔으니 내일부터 자기 집으로 들어오라고 하는 것이었다. 하숙비는 한 달에 미화 300불이며 하루 삼시 세끼 식사에 세탁 및 청소까지 하여 준다기에 너무도 고마웠다. 이튿날 김병하 친구의 하숙집으로 갔다. 가서 보니까 서영수씨와 친구의 아들 김성철 그리고 나 3명이 같은 방에 기거하게 되었다.

바로 이웃에 안경 장사하면서 환전을 하고 있는 김종수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밤이면 매일 같이 우리 하숙집에 놀러 왔다가 밤 9시경 자기 집으로 돌아가곤 하였다. 이곳에 놀러 오는 사람들은 모두가 신뢰성이 있고 예의 바르고 정직하게 살고 있었다. 하숙집으로 거처를 옮기고 약 1주일이 지났다. 오늘도 아침부터 올림픽 사무실로 가서 매일 같이 모이는 사람들과 수인사를 나누었으며, 이제는 모두와 친분이 두터워져서 연하인 그들이 이제 나만 보면 형님이라고 깍듯이 불러주었다. 그 들 대부분 서울을 왕래하며 보따리 장사들을 하였으며, 큰 수입은 없었지만 베트남에서 생활하는 데는 별 지장 없이 잘 지내고 있었다.

오늘도 평상시와 같이 올림픽 사무실로 출근 하였는데, 오전 10시경 사무실로 걸려온 전화가 “나를 찾는 전화” 라고 하면서 여직원이 전화를 건네주었다. 나는 “예, 차상덕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더니 대뜸 “형님 저는 방콕에 있는 김형곤 입니다.” 하는데 나는 깜짝 놀랐다. 김형곤 군은 중앙대 출신으로 이란에서 만났으며, 그 당시 이란에서 실업자로 고생하고 있던 그를 내가 다니던 회사에 취업시켜 5년 동안 동거동락 하였던 후배였다.

전화 내용은 호주에 있는 김원강씨로부터 형님의 소식을 들었으며, “어떻게 하시다가 베트남까지 오셔서 고생을 하십니까?” 하면서 매우 걱정을 하는 것이었다. “저는 현재 아시아나 항공사 방콕 지점에 전무로 근무합니다. 조만간 방콕에 꼭 한번 방문해 주십시오” 하면서, “베트남 호찌민 시에 있는 신발 생산 공장인 “정신 비나” 를 찾아가시어 사장 백성철씨를 만나게 되면 미화 1,000불을 드릴 겁니다. 약소 하지만 우선 조금이나마 생활 안정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라고 하는 것이었다.

호주에서 지난번에 나에게 2,500불을 보내어 준 김영관군이 태국에 있는 김형곤에게 내가 베트남에서 고생하고 있다고 이야기 하여, 김형곤 군이 나에게 전화를 하게 된 것이었다. 참으로 고맙기가 한량없는 후배들이었으며 의리를 지킬 줄 아는 후배들이었다. 그리하여, “정신 비나” 신발공장을 방문하여, 사장 백성철씨로부터 1,000불을 건네받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나오려는데 “잠시 만요.” 하면서 베트남 돈 1,000,000동을 주며 “교통비에 써 주십시오.” 하며 봉투에 넣어 주기에 극구 사양하였으나 나의 양복 호주머니 깊숙이 넣어 주면서,” 앞으로도 어려운 일이 계시면 언제라도 좋으니 저를 찾아 주십시오.” 라고 했다. 그 길로 올림픽 사무실로 오면서 “어쩌다가 내 신세가 오늘날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하염없는 푸념을 하면서도 앞으로의 새로운 미래 건설을 위하여 의지를 불태웠다.

건설인으로 새 출발

이제는 약간에 여유가 있었기에 우선 서울에 있는 코오롱 건설 해외공사 본부장으로 있는 장관영 상무에게 국제전화를 하였다. 나의 전화를 받던 장관영 상무가 “아니 언제 베트남에 가셨습니까?” 하기에 간단하게 설명 하여주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듣자 하니 코오롱 건설에서 베트남에 방직 공장을 건립 한다는 소문이 있는데 정말이냐?” 고 물었더니, “앞으로 10일 내로 현장소장이 베트남에 들어 갑니다” 하는 말에, 나는 “내가 현재 이곳에서 매우 어렵게 지내고 있으니 내가 할 수 있는 공사를 줄 수 있겠느냐?” 하였더니 “걱정 하지 말고 베트남 공사 현장 소장에게 차 사장님의 소개를 하고, 꼭 공사일부를 차 사장님이 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고, 현장 소장이 베트남에 도착과 동시에 차 사장님께 전화하여 만나 뵙게끔 할 터이니 걱정 하지 마시고, 우선 건강에 유의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면서 통화를 끝내었다. 그 후로 나는 코오롱 소장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10일간이 왜 이다지도 길고 지루한지 기다리느라고 무척 애를 먹었다.

1995년 6월 27일 드디어, 서울에서 장관영 해외공사 상무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일 현장소장이 베트남에 도착하니 전화가 오면 꼭 만나보라는 통보 전화였다. 나는 얼마나 기쁘고 고마운지 그 당시의 심정은 평생 처음으로 느껴보는 희열이 넘치는 기분이었다. 장관영 상무와는 1968년도 베트남의 대림산업 회사에서 만3년 동안 같이 일 하였으며, 서울 동부 이촌동 공무원 아파트 같은 동네에 살았었다. 그 당시 집사람이 중학교 여교사를 소개하여 결혼시키려고 맞선까지 보아, 본인은 마음에 드는데 장관영 형이 반대하여 결혼이 무산 된 적도 있었다. 그 정도로 나 하고는 친분이 두터웠던 장관영이었다.

장관영은 연세대학교 건축공학을 전공하였으며, 정말 보기 드문 엘리트였다. 이튿날인 1995년 6월 28일 오후 3시경 올림픽 사무실로 전화가 왔다. 코오롱 충남방직 현장 소장이었다. 내용은 오늘 오후 4시까지 시내에 있는 렉스호텔 커피숍으로 나오라는 전화였다. 나는 정각 4시에 호텔로 가서 현장 소장을 만났다. 그는 나를 만나자마자 흰 봉투 하나를 건네어 주면서 이것은, 본사에 계신 장관영 상무님께서 차 사장님께 전하여 드리라면서 나에게 주기에 일단 호주머니에 넣어두고, 코오롱 현장 소장의 말을 들어보았다. 현장 소장이 하는 말이 본 공사는 서울 본사에서 현지건설 국영업체에 발주가 되었고, 차 사장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은 잡철물 공사밖에 드릴 수 없다며 미안 해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만이라도 고마우니 최선을 다하여 협조하겠다고 하였더니, 내일부터 이틀간 베트남에 있는 자재상과 공구상을 알선하여 달라하기에 그렇게 하겠다고 하였다. 5일 후에 차 사장님은 충남방직 현장으로 오셔서 현장을 돌아보시고 도면을 드릴 테니 참고 하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5일 후 현장을 돌아보기로 하고 현장 소장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면서 장관영씨가 보내준 봉투를 개봉하였더니, 편지 한 장과 미화 1,000불이 들어 있었다. 편지 내용은 어떻게 베트남에 들어가시게 되었으며, 그간 베트남에서 고생이 매우 심하셨겠다며 나를 위로하여 주는 마음에 또 한번 사나이의 뜨거운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참으로 고마운 사람이었다. 5일 후 현장에 갔더니, 현장 소장이 일단 현장부터 돌아보자고 하기에 현장을 같이 돌아본 후에 사무실로 갔다. 사무실에서 나에게 도면을 주면서 일주일 내로 견적서를 제출하라고 하기에 도면을 가지고 집에 돌아와 견적서를 작성하여, 일주일 되는 날 같은 집에 지내고 있던 서영수씨를 데리고 공사 현장에 도착하였다. 현장 소장에게 견적서를 제출하였더니 담당 부서장들을 부르더니, 약 30분간만 회의실에서 기다려 달라고 하기에 나는 서영수씨와 함께 회의실에서 기다렸다. 약 30분이 지난 후 현장 소장과 부서장들이 회의실로 들어왔다. 그중 실무자들이 나에게 작업과정 등을 물어보기에 묻는 질문에 답변을 상세하게 하여주었더니, 약 10가지 질문을 던진 후에 실무자들이 “현장 소장에게 차 사장님의 실력 같으면 공사에 아무런 차질이 없을 것 같습니다. 계약 체결을 하셔도 좋겠습니다” 하고 현장 소장에게 건의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현장 소장이 하는 말이 역시, 장관영 상무님의 말씀대로 이 부문 최고의 기술을 가지신 분이니 무조건 공사를 주라고 하신 말씀이 새삼스럽다 하며 계약을 체결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1995년 7월 10일부터 공사 현장에 투입되어 공사를 착수 하였고, 서영수씨를 데리고 일을 가르치면서 같이 일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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