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태현 전 주베트남 대사의 격주기획연재> 베트남과 호치민 (12) 성난 말(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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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1년 꾸옥이 새로 이사한 아파트
전기가 안 들어와 등잔불을 켰으며 난방이 안 되어
주인집에서 데운 벽돌로 몸을 녹였다.
사진관에서 해고당한 후 방 한 칸짜리 이곳에서
사진을 손질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언론에도 손을 대다

프랑스 등 서구 사회주의자들이 아시아 국가의 수준을 낮게 평가하여 사회주의 혁명을 수행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주장에 대하여 꾸옥은 강한 반발심을 가졌으며 오히려 아시아인들이 각성하는 날 엄청난 힘이 되어 세계 혁명을 수행하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꾸옥은 동시에 ‘프랑스 문명의 위대함’ 이라는 신화에 도전했다. 그는 우월한 문명 (La Civilation Susperieure) 이라는 글에서 한 프랑스 병사의 일기에 나오는 프랑스인의 잔혹함을 구체적인 사례로 들어 자유, 평등, 우애라는 프랑스 혁명 이념을 조롱했다. 또 어느 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후에의 국학에 다닐 때, 프랑스인 교사가 학생에게 했던 가혹 행위를 이야기 하면서 이 일이 모든 교실마다 걸려있는 “당신을 보호하는 프랑스를 사랑하라” 는 구호 밑에서 벌어졌다고 빈정거렸다.

꾸옥이 점점 급진적인 성향을 보이자 프랑스 당국도 그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였으며 식민부로 불려가 사로 장관과 면담하게 되었다. 사로 장관이 “프랑스가 인도차이나를 당신네한테 돌려준다 해도 당신네는 무장이 되어있지 않아서 스스로를 통치할 수 없다” 고 말하자 꾸옥은 “그 반대다. 만일 프랑스가 우리나라를 우리에게 돌려준다면 우리가 스스로를 통치하는 방법을 안다는 것을 틀림없이 확인하게 될 것이다” 라고 받아쳤고 말문이 막힌 사로 장관은 화제를 바꾸었다.

이와 같은 꾸옥의 급진적인 성향은 빌라 드 고블랭의 동료들 간에도 긴장을 가져왔다. 매일 저녁 아파트에서는 격렬한 토론이 벌어졌으며 어떤 동료는 꾸옥의 극단적 견해가 고블랭에 살고 있는 동료들의 공식 입장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하고 아파트를 떠나는 동료도 있었다. 꾸옥도 불편을 느꼈는지 노동계급 거주 지역에 작은 아파트를 얻어 이사했다. 새로 이사한 아파트는 검소하기 짝이 없었다. 방 하나짜리 아파트는 침대, 작은 탁자, 옷장이 들어가면 남는 공간이 없었으며 하나 뿐인 창밖으로는 옆 건물의 벽만 보였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등잔을 썼으며 수도가 없어서 대야에 물을 받아다 세수를 하고 옷도 밖에서 빨아야 했다. 추울 때는 집 주인의 화덕에서 데운 벽돌을 신문지에 싸서 몸을 녹였다. 이사를 한 후 집 근처의 사진가게에서 새로 일자리를 얻었으나 주 40프랑의 박봉이었다. 이러한 곤궁한 생활이 꾸옥의 삶에 큰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그는 계속 정치 집회에 정기적으로 참석하고 미술 전람회를 구경하고 도서관도 자주 찾았다. 경찰 보고서에 의하면 꾸옥은 자주 방문객을 맞이하였으며 그가 받는 보수로는 월세를 내고 남는 것이 거의 없었음에도 전국 각지를 여행했는데 이것은 그가 공산당으로부터 지원금을 받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꾸옥은 프랑스 급진파들과 제휴를 통하여 혁명적 대의를 알리는데 언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고 1922년에 식민지 민족들의 대변인 역할을 맡을 수 있는 정기 간행물을 만들었다. <르 빠리아(Le Paria, 천민)>라는 제호의 이 신문은 1922년 4월 1일에 창간되어 한 달에 한 번 씩 간행되었으며 프랑스 어로 인쇄되었지만 발행인 란의 제목은 한자와 아랍어로도 적혀있었다.
꾸옥은 이 신문의 편집인이자 가장 중요한 기고자이기도 했으며 직접 삽화를 그리기도 했다. 이따금씩 배포를 책임지기도 하고 구독자에게 직접 배달을 하기도 했다.

꾸옥은 <르 빠리아>를 통하여 글 쓰는 솜씨를 꾸준히 키워나갔다. 그는 한 호에 두 세 편의 사설을 써 세계정세를 다루기도 하고 프랑스가 식민지에서 저지르는 만행을 고발하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의 글은 꾸밈이 없고 현학적이지 않았으며 요점을 전달하기 위하여 사실과 숫자를 많이 인용해 독자들의 눈에는 그가 걸어 다니는 통계학 사전으로 보였다. 그는 이론을 무시하고 식민지 체제와 그 수레바퀴 맡에 깔린 사람들이 겪는 고난을 직접 거론하면서 늘 분개한 목소리로 비판했다.

훗날 그의 삶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볼 때 그토록 매력 있고 성격 이 미묘한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단순하고 평이한 글을 썼는지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바로 여기에 그의 인격과 그가 오랜 세월동안 유지해 온 정치적 영향력의 비밀이 숨어있다. 그는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과는 달리 자신의 독자가 노동자, 농민, 병사, 사무원 같은 보통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중시했다.

그는 자신의 지식을 과시하여 독자에게 감명을 주기보다는 단순하지만 생생한 말로 그들을 설득하여 자신의 세계관을 공유하고 변화를 성취하는 방식을 취했다. <르 빠리아>는 곧 프랑스에서 억압받는 사람들을 대변하는 중요한 매체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꾸옥은 나중에 이렇게 회고했다.

“프랑스어를 읽지 못하는 노동자들도 우리 신문을 샀다. 그들이 이 신문을 사고 싶어 했던 것은 그것이 반 서양적 성향을 지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프랑스 노동자들에게 신문을 읽어 달라고 했다. 우리는 모두 동지였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 대신 신문을 팔아주고도 대가를 요구하지 않았다. 프랑스 식민부에서도 신문을 구입했다.” 꾸옥은 이 신문을 식민지로 몰래 들여보냈다. 처음에는 의식 있는 선원들의 짐 속에 보냈으나 경찰이 눈치를 챘기 때문에 장난감 시계 속에 넣어 보내는 등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신문이 잘 팔리지를 않아 그냥 줘버리는 경우도 많았다. 경찰은 감시의 눈을 거두지 않았으며 알려진 구독자들은 모두 경찰의 블랙리스트에 올라갔다. 꾸옥은 파리에서 발행되는 다른 좌파 신문이나 정기 간행물에도 꾸준히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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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르 빠리아>에 꾸옥이 그린 삽화
만화 속의 유럽인은 이렇게 소리친다.
“서둘러라, 이름도 없는 자야.
제발 네 충성심을 보여라”
꾸옥은 그림에도 상당한 소질이 있었던 모양이다.

성난 말 혁명의 진원지 모스크바로

1922년 마르세이유에서 열린 박람회에 초청을 받아 베트남 황제 카이 딘(啓定)이 프랑스를 방문하게 되었다. 그의 암살 기도가 있다는 소문이 나 돌았으며 사로 식민부 장관은 판 추 찐에게 황제의 방문에 반대하지 말라고 설득하였으나 찐은 오히려 정복된 나라의 꼭두각시 통치자 역할을 거세게 비판하는 공개서한을 황제에게 보냈다. 꾸옥도 신문 기고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황제의 방문을 조롱했다. 황제의 방문은 찐과 꾸옥이 다시 결합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었으나 이미 사이가 너무 벌어져 있었다.

찐은 한 젊은 동료에게 보낸 서신에서 ‘꾸옥을 성난 말’, 자신을 지친 말’ 이라고 비유하여 자신이 보수주의자임을 자인하면서도 꾸옥의 투쟁 방법에 대하여 불만을 토로했다. 그는 꾸옥이 외국에서 노동자들이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언어로 글을 쓰면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으며 하루 빨리 베트남에 돌아가 국내에서 직접 동포에게 호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꾸옥은 찐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몇 년 만에 이미 프랑스 공산당의 지도적인 당원으로서, 그리고 공산당 내에서 식민지의 입장을 대변하는 가장 유명한 인물이 되어있었다. 그는 프랑스 공산당원과 토론하는 기회를 자주 가졌으며 1921년 제 1차 공산당 대회에서 식민지 문제에 대해 연설하고 센 지구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꾸옥은 경찰의 집요한 감시를 받았으며 경찰이 손을 썼는지 아파트 옆의 사진관에서 해고당하자 자신의 방에서 사진 일을 계속했다.

사로 장관은 작전을 바꾸어 꾸옥을 회유하려고 했다. 그는 꾸옥처럼 고상한 목적과 굳건한 의지가 있는 사람을 존경한다고 하면서 무엇이든지 들어 줄 테니 원하는 것을 말하라고 하자 꾸옥은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우리 동포의 자유라고 대답하고 장관실을 나왔다. 며칠 뒤 꾸옥은 식민부에 공개서한을 썼으며 이것이 <위마니떼> 등 진보적인 신문에 실렸다.

그는 서한에서 프랑스 당국이 전속부관(경찰 감시원을 뜻함)을 붙여주시어 감사한다면서 이렇게 썼다.

“의회에서 예산을 절약하고 행정부 예산을 줄이려는 이때, 대규모 예산 적자가 발생하는 이때, 농업과 산업에 노동력이 부족한 이때… (중략)…

전속부관을 두고 호사를 누리는 것은 비애국적인 일로 여겨진다. 프롤레타리아는 땀 흘려 일하는데 전속 부관들은 게으름을 피우며 돈을 허비하고 있으니 이로 인해 불가피하게 시민들의 힘의 손실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는 이 호의를 사양하기 위해 자신의 일상생활을 공개하겠다고 덧붙였다.
오전 : 작업장(8:00-12:00)
오후 : 신문사 또는 도서관
저녁 : 집 또는 교육적인 대화자리 참석
공휴일 : 박물관이나 다른 흥미 있는 곳 방문
자 이제 되었는가? 이 편리하고 합리적인 방법이 귀하에게 만족을 주기를 바라며
응웬 아이 꾸옥”

이 편지를 본 사로 장관은 모리스 롱 인도차이나 총독에게 꾸옥을 체포하여 본국에 송환시키는 방법을 검토 중이라고 말했으며 총독은 프랑스에서 그의 활동을 추적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이의를 제기했다.

프랑스 정부나 총독에게 꾸옥은 골치 아픈 존재였던 것이다.

꾸옥의 이런 열렬한 투쟁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공산당은 식민지 문제에 대하여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프랑스의 노동자들은 원주민을 행동하는 능력은 말할 것도 없고 이해 능력도 떨어지는 하찮은 인간으로 여겼으며 독립능력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22년 10월 꾸옥은 파리의 당 대회에서 만난 소련 코민테른의 고위 관리인 드미트리 마누일스키로부터 모스크바로 와서 코민테른을 위해 일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1923년 6월 13일 꾸옥은 친구들에게 3주 동안 프랑스 남부로 휴가를 가겠다고 말하고 어느 날 영화관에서 뒷문으로 슬며시 빠져나와 베를린 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는 베를린에서 함부르크로 가서 여객선을 타고 6월 30일, 중국 상인의 행색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다. 손에는 첸 방이라는 이름의 비자를 쥐고 있었다.

꾸옥의 소련 행은 판 추 찐의 개혁의 길과 결별하고 레닌의 혁명적 대의를 끌어안는 상징적인 행동이기도 했다.
아버지의 친구이며 스승인 찐은 어떤 베트남 사람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 꾸옥을 비판자들로부터 옹호하고 장도를 빌어주었다.

“꾸옥이 비록 어리고 그 행동에 지혜로운 숙고가 부족하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소. 그에게는 애국자의 마음이 있기 때문이오. 꾸옥은 동포를 해방하기 위해 외롭고 어려운 길을 택했소. 따라서 우리 모두 그의 강건한 마음을 존경해야 하오.”

<달랏대학교 한국학과 강사. 럼동성 명예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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